1. 140여년 전인 1870년경의 일이다. 1869년과 1870년 연이은 흉작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는 봉금지역이라고 하는 무인국경지대가 설정되어 있었다. 국경이 맞닿아 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청과 조선이 일종의 비무장 출입금지구역인 국경지대를 설정해 둔 것이다.봉금지역으로의 출입금지선을 봉금선이라고 하는데, 조선 측 봉금선은 바로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다. 조선은 백성들의 도강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참수형에 처하고
1. 1909년 간도협약은 간도 영유권의 권원이 되지 못했다. 간도협약은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제3국에 불과한 대한제국에는 효력이 미치지 않으며, 나아가 1952년 중·일평화조약에 의하여 만주협약과 함께 무효화된 조약이기 때문이다.간도협약이 무위(無爲)로 돌아간 이상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에 간도가 중국 영토였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과연 중국은 무엇을 증거로 제시할 수 있을까.간도 영유권 분쟁은 한·중 간의 전통적인 국경선이 어디였는가를 밝히는 문제이다. 중국은 한·중 간의 전통적인 국경선이 자연하천인 압록강과 두
1. 중국은 간도협약에 의해 간도영유권분쟁이 종결되고 간도가 중국 영토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904년 9월 4일 베이징에서 체결된 간도협약의 정식 명칭은 일본명으로는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 중국명으로는 ‘중·일도문강만한계무조관(中日圖門江滿韓界務條款)’이며, 모두 7개의 조문으로 되어 있다.대일본제국 정부와 대청국 정부는 선린의 호의에 비추어 도문강이 청·한 양국의 국경임을 확인함과 아울러 타협의 정신으로 일체의 변법을 상정함으로써 청·한 양국의 변민으로 하여금 영원히 치안의 경복을 향수하게 함을 욕망하고 좌(左)의 조
1. 실효지배란 어떤 국가가 특정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국제법상 실효지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①목적물을 평온하고 공연하게 점유하였을 것 ②평온하고 공연한 점유가 일정 기간 계속되었을 것 ③본래의 권리자가 일정 기간 동안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것 등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중국은 모의답변서에서 1909년 간도협약 체결 이후 중국이 간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한 적이 없다고 반박해 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중국은 1909년 간도협약 체결 이후 105년 동안 간도를 실효지배
1. 간도 영유권에 관한 본안 문제에서 첫 번째로 넘어야 할 산은 1962년 10월 12일 체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다.조·중변계조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국경조약으로, 천지를 반분하여 서북 방면은 중국, 동남 방면은 북한의 영토로 하고, 천지 서쪽은 압록강, 천지 동쪽은 홍토수를 거쳐 두만강으로 국경을 획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제1조 ①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 중 선남단상의 2520고지와 2664고지 간의 안부(鞍部·산의 능선이 말 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의 중
1. 지금까지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과 관련하여 간도 영유권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인식을 공유하고 간도 모의재판을 전제로 모의 소장과 답변서를 작성해 보았다.대한민국은 모의 소장에서 간도가 왜 반환되어야 하는지 역설하였고, 중국은 모의 답변서를 통해 간도가 중국의 고유영토로서 반환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반박하였다.중국의 반박을 대한민국이 극복할 수 있다면 간도수복론이, 그렇지 않다면 회의론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 바, 중국의 반박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며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 보기로 한다.2.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상대로 간도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겠지만 우선 소송에 이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만은 분명하다. 소송에 질 경우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간도 모의재판은 통일을 앞두고 간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국론을 정하기 위한 것이니만큼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행여 승소를 낙관하여 무모하게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판을 초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소장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항변할 수 있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다 되어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였던가? 북한에 가로막혀 접근하기 어려운 간도 땅은 우리들의 뇌리에서 하루하루 잊혀져 가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어딘가로 알려져 있는 간도는 한민족의 아련한 기억 저편 어딘가의 어렴풋한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간도에 관한 한민족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간도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이 지금에 와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그들은 간도가 한민족의 고유 영토라며 이를 되찾아야 한다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국회에서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제목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었다.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는 1867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작성된 일제의 기밀문서 가운데 간도영유권 관련 문서들의 번역본과 영인본을 수록한 자료집이다. 자료집 뒤에는 분량 때문에 미처 싣지 못한 기밀문서 목록이 첨부되어 있고 ‘일본 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 간도 관련 핵심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당시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지난 4월 2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센카쿠가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임을 천명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방문 시 독도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대상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만일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할 경우 미국이 우리와 공동 대응할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4월 25일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기자회견장에서 이에 관한 질문이 없었던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배상금 문제에 비해 독도 문제는 상대적으로 쉽다. 전자는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과 관련되어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반면, 후자는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 논리를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독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승소할 수 있는 것처럼 공세적 모습을 취하는 데 반해 대한민국 정부는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독도밀약’이다. 독도밀약이란 1965년 한·일수교조약 체결에 앞서 체결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비밀조약으로 2007년 모 월간지에 이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에 의하면 독도밀약이 체결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수교를 성사시키기 위해 외무장관에 이동원, 주일대사에 김동조를 새로이 임명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문제는 독도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한일은행 상무로 있던 김종필의 친형 김종락을 밀사로 파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일찍부터 독도를 발견하고 이용해 왔으므로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보아야 한다. 무주지 영토편입조치를 취한 것은 영유권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일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 태종 때 시작된 ‘울릉도 공도정책’ 때문이다. 울릉도 공도정책이란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육지로 쇄환하고 울릉도를 비워두는 정책을 말한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울릉도와 죽도, 석도를 울도의 관할로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은 칙령상의 석도가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시키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은 5등으로 한다.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도 전체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한다.반면 일본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상의 석도는 울릉도에 붙어 있는 관음도 내지 울릉도 주변의 바위섬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 칙령은 결코 독도영유권의 근거가 될 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 근거 중 하나가 바로 1905년 2월 22일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이다.‘오키섬에서 서북쪽으로 85해리 떨어져 있는 섬을 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이제부터 본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한다.’시마네현 고시 발령 전인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 각료 회의에서 독도 영토편입 결정이 이루어진다.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도에서 서북쪽으로 85해리에 있는 이 무인도는 타국에서 이를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이 없고, 메이지 36년(1903년) 나카이 요자부로가 어사를 만들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불편한 진실 중의 하나가 바로 한·일어업협정이다. 한·일어업협정은 1965년에 처음 체결되었다가 1999년에 다시 체결되었다. 전자를 구(舊)한·일어업협정, 후자를 신(新)한·일어업협정이라 한다.현재 독도 12해리 바깥 수역은 중간수역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이용하고 있다. 독도를 다녀오신 분들 중에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해역에 일본 경비정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분개하셨던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일본 경비정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상 이 수
일본은 마치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승소할 수 있는 것처럼 강력한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이 자신 있게 제시하는 근거들이 대한민국에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약한 고리를 강한 고리로 바꾸어야 한다. 대한민국에 약한 고리로 보이는 것들을 찾아보고, 그를 분석해 보자.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첫 번째 근거는 뭐니 뭐니 해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다. 1951년 9월 8일 연합국 측 48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